[History] 4·19는 혁명인가?

PSLeon ㅣ 2023. 9. 2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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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혁명인가

Reference: 「KBS 역사저널 그날」, <4·19 혁명 60주년 기획 : “피의 일주일, 4·19부터 하야까지“>, 2020. 4. 14.

 

핵심 순서: 2.29 → 3.15 → 4.11 → 4.19 → 4.25 → 4.26

 

혁명의 개념

혁명(revolution): 세상의 근본을 바꾼 큰 변화

영국에는 명예혁명(1688), 산업혁명(18세기 중엽)가 있었다.

  • 명예혁명: 제임스 2세의 친가톨릭 정책과 전제 정치에 반대하여 의회가 주도한 무혈혁명, 유혈사태 없이 이루어진 혁명이기 때문에 ’명예혁명'이라고 함.

역성의 혁명은 왕권 세력의 성이 바뀐 것이지 국가와 백성의 근본 관계가 바뀐 것이 아니므로 혁명이 아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혁명생산양식에서 다음 생산양식으로의 질적 도약을 위한 일종의 지각변동에 해당

프랑스 혁명: 새 사회의 주인공인 ‘부르주아’가 봉건세력을 물리치고 권좌를 차지한 ‘부르주아 혁명’

한국사에 민란이 여러 번 있었으나, 지배 구조나 권력 구조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으므로 혁명이 아니다.

동학농민운동(봉기)는 엄밀히 말하면 혁명이 아니다. ⇒ 1894년 동학 농민 봉기는 중앙에 근대적 정권을 수립하는 일에 실패했으며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혁명이라고 개념화할 수 없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에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개혁 내용보다는 법과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혁명적 요소가 부족하다.

즉, 1894년 동학농민봉기는 혁명이 아니었다. 완성하고자 하는 뚜렷한 혁명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미완(未完)의 혁명’도 아니다.

 

4·19 주도 세력: 학생, 지식인, 일반 시민

 

4·19 전개과정

4·19 혁명은 12년에 걸친 이승만 정권의 민주주의 훼손과 부정부패가 곪아서 터진 사건이었다.

1. 1960년, 당선이 유력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 갔으나 대선 한 달 전 미국의 병원에서 사망 ⇒ 민주당에서 선거 연기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부통령 후보 장면만이 입후보

2.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야당 선거 유세(부통령 후보 장면)에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요일'임에도 등교를 시키자 이에 항의하며 학생들이 시위, 경찰의 진압과정 중 부상자 발생 / ‘대구 2.28 의거’ 하루 전날 수업 단축 후, 자유당 유세 현장에 동원

3.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전국에서 시위 발생, 마산에서 경찰이 시민을 향해 발포, 많은 사상자 발생 / 시위 때 실종된 김주열 군의 시신이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름. 이에 많은 시민 분노, 마산 곳곳에서 시위 및 자유당 관련 인사들의 저택 습격 및 방화, 인근 파출소 및 경찰서 습격

  • 김주열: 남원 출신, 마산상고 예비 신입생, 3월 15일 실종

4.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시위, 귀교 도중 대한반공청년단의 습격을 받음.

5. 4월 19일(피의 화요일) 서울의 초중고, 대학생들이 오전부터 거리에 나와 가두시위를 벌임. 시위대가 경무대 앞 최후 저지선에 이르자 경찰이 학생들 향해 발포(오후 1시 40분경). 대열 앞쪽의 동국대생, 동성고, 연세대생들 희생, 오후 2시 40분경 계엄령 선포, 오후 4시 30분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경비계엄 선포, 오후 5시에 추가로 계엄령 선포

  1. 4월 24일 시위가 격화되면서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와 공직 사퇴 발표
  2. 4월 25일 민주당은 ‘이승만의 하야 및 재선거 실시안’을 국회에 긴급동의로 제출. 이날 대학교수단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거리 시위에 나섰다.
  3. 4월 26일 새벽 5시경부터 서울 시내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전 9시경 시위대가 광화문을 가득 메우며 군 저지선까지 다가섰다. 이승만은 오전 10시 30분경 라디오를 통해 “국민이 원한다면 사임하겠다.”라는 하야 성명을 발표.
  4. 이후 개헌 협상이 자유당과 민주당 간에 이루어지면서 6월 15일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민의원과 참의원)를 주 내용으로 하는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어 7월 29일 총선이 실시.

 

4·19의 성격

초기 4·19에 대한 인식: 1960년 2월 28일 의거 ~ 4월 26일 이승만 정권 붕괴되는 시점

 

4·19의 발발과 5·16으로 좌절되기까지의 3단계 과정

1단계: 2·28 대구 의거부터 이승만 정권의 몰락까지 단계이다.(대부분 사람들은 이 시기의 활동과 성과를 중심으로 4·19를 인식)

2단계: 이승만 정권의 몰락 이후 1960년 7·29 총선까지이다.(이 시기에 이승만 정권의 잔재 청산과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가 미미)

3단계: 과거사 청산과 통일 논의가 활성화되고 학생 세력과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주도 아래 민족 통일 운동으로 발전하는 단계

 

4·19는 무엇을 바꾸었나?

이승만 및 자유당 세력을 권좌에서 쫓아 냈고 내각책임제 정부를 수립하였다. 또한 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장면이 총리가 되었다.

4·19 직후 해결해야 할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5·16을 맞았다.(시급한 개혁 대상은 경찰군대)

 

4·19는 혁명도 미완의 혁명도 아니었다. 완성하고자 하는 뚜렷한 혁명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4·19가 혁명이 아니었다고 해서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혁명이라고 미화할 필요도 없다. 4·19를 ‘4월 봉기’ ‘4·19 의거’ ‘4월 민주 항쟁’ ‘4월 민중 항쟁’ ‘4·19 민주화 운동’라고 불러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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